• 중국의 역사와 인영

    • 1. 印靈의 始源
    • 現在 볼 수 있는 中函의 印墨는 般墟出土라 依해온 三個의 銅印이 最古인데 中国文化의 起源 漢字演變의 過程에서 推想해 본다면 그 榮生은 다시 古代로 遡及하여 하여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中国의 印의 始源을 五千年 前에 있었던 西方印의 東滿이라 할지 中國姑目의 榮生이라 할는지 斷定하기 어려운 問題인데 古來 中國에는 온전히 文字의 印을 만들었고 西方에는 書像印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根本的인 相違가 있다. 結論은 將來의 所究 榮掘을 기다리지 아니 할 수 없다.
    • 2. 設 西周時代
    • 現在 三個의 般墨는 어느 것이나 方七,八分大의 書銅手板으로 작은環鈕가 붙었고 印面은 모두 陽文으로 交字는 当時의 甲骨文과 같다. 그런데 亞字格에「羅」 字를 새긴 印은 金文에도 그와 같은 形이 있으므로 個人의 印이 아니고 氏族及至 集回의 標章으로 推測된다. 祭政一致를 받들은 神聖政治의 時代에는 대개가 이와 같은 印墨도 虛祝占 卜의 機關에 密着되어 極히 적은 範園의 用途로 限定되어 있었을 것이다.
    • 3. 東周時代古錄의 盛行
    • 現在 古錄이 라 通稱하는 印은 從來戰國 以前에 遡及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簡卓히 論定하기 어렵다. 春秋 戰国의 時代 封建 貴族 階級의 美權은 餘餘히 몰락되고 麻民이 勤興되어 前代에 볼 수 없었던 多樣한 文字, 錢幣 印章等이 一擧盛行되었다. 麻民의 開放에 依한 한개 의 _覺으로 한個를 代表하는 壐印이 만들어져서 印이 所有標章으로 새로운 性格을 確美히 보여 주었다. 当時는 印이라 하지 않고 尊卑의 別도 없이 다 鉢이라 稱했다. 官印, 私印, 肖生印, 吉語印 等으로 大別하고 大部分이 鑄造印으로 形體, 材質, 紐式은 自由로서 規則的이 아니다. 特히 刻風은 空想的인 構成을 駆使했고 文字는 金文과 다르게 强特한 組織을 보여주었다. 当時는 종이가 없고 단지 木簡과 竹簡을 使用했기 때문에 印도 朱肉으로 押操하지 않고 대개는 簡讀을 맨(緩) 銳上에 振土를 바르고 押印해서 封檢하는데 使用하였다. 統一国家로 成立된 奏漢代에는 印制의 確立과 같이 封流는 印의 使用 面의 太半을 古領하게 되었다.
    • 4. 奏漢時代 典型의 確立
    • 素은 天下를 統一하고 郡歸制国家의 集權組織을 完成했다. 群雄割據의 戰国時代에 定制化되지 못하였던 官印의 制度는 素朝에 依해 確立되어 印이 封拜의 證據 物件으로 새로운 使命을 가져오게 되었다. 皇帝의 것을 靈라 稱하고 臣下의 것을 印이라 稱했다. 「印」 字가 印章에 쓰워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文字는 小察과 거의 同一한 構成으로 官印은 方七, 八分 白文四字 田形의 輪廟을 붙여서 類型을 統制하고 古錄의 奔逸을 바로잡고 沈靜한 威嚴을 表出하는데 힘을 쓰게 되었다. 私印 等도 当時의 石刻權量의 文字에 가깝고 대개는 刻印 白文으로 輪廟을 둘러 俊拔淸秀한 風을 보였다. 私印의性質上 上은 戰国,下는 漢初에 屬하는데 一般으로 戰國 以來의 小印을 周奏小錄이라 稱하고 있다.
    • 漢代의 官印은 泰의 制度를 織統해서 階級의 土下에 依하여 材質鈕式, 緣色等의 民分이 厳重히 確立되이 아주 적은 例外를 除하고는 輪麻을 省略하고 奏蒙의 國勢를 襲하며 平方正直의 소위 緩蒙體를 形成해서 莊重典雅한 印의 典型을 完印制上 前漢의 官印은 三期로 나눌 수 있는데 武帝의 太初 元年(前 一○四年) 五字印制가 設定되어 「章」 字 또는 「印章」 二字達用이 印文으로 나타난 것은 가장 큰 變化인 것이다. 王奔의 陰謀에 依해서 漢朝는 엎어지고 新이 與하게되자 中典 地方의 官制의 全面的인 改許에 依해서 印도 全部 變更되 었다. 王奔은 傷古 趣味와 性格욜 反映시키어 極히 複雜한 印制를 設定해서 上下의 民別없이 五字의 印을 制作하도록 하고 刻風은 단지 整齊를 求하고 理想化의 極硬으로 餘韻이 缺乏되게 되었다. 役漢은 前漢의 印制를 復活시켰는데 刻風은 新奔으로 延長으로 極端히 空白을 싫어하고 直線的 構成이 剛强하였는데 漢未에서 三国時代사이에 榮生되었다고 생각되는 襲印의 草率의 風과 같이 急激히 타락된 一途이 었을 것이다. 私印도 大體 官印의 流를 좇아 대개 白文正方形으로 五分前後 穴七分으로 漸次 크기가 增大되어 가고, 表字印 臣妾印 子母印 等이 새로 나타나 私印의 盛行은 前後에서 볼 수 없을 程度였다.
    • 5. 三国 大朝時代 潮落期
    • 後漢에 榮明된 紙의 普及은 三國 以後 餘餘히 簡讀으로써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라 封派가 必要 없게 되니 印의 使途上에 一大變革期를 맞게 되었다. 三國西音 때에도 아직 漢印의,格을 가지고 있었으나 東普에서 南北朝 対立 時代에는 過激한 各國의 興亡에 隋伴되어 各其 特異體를 보이며 未期的 混乱期를 맞아 官印의 權威의 崩壞 使命의 終焉이 顯著하였다. 南方에는 萎靡怪異한 風에 沈滯되었고 北方에는 粗犬奇峭의 體로 變貌되어 크기도 方一寸을 넘게 되고 形式的으로 餘端을 保存해온 官, 私印은 加速度的으로 堕落의 一路을 걷게 되었다.
    • 6. 隋, 唐以降 印의 性格變化
    • 紙上에 朱로 印한것은 穴朝 未期에 시작 되었는데 使用 便宣上 朱文印으로 一變되었다. 또 暗代에 이르러 從來의 官職印은 腐하게 되어 官署印만으로 되고 漢에서 盛行된 私印의 使用도 終息되어 一時的 空白期를 맞게 되었다.
    • 現在의 精代의 官署印 三個는 다 朱文印으로 方一寸七分으로 文字는 開放된 典雅한 淸趣를 表現하였고 唐•末代에 는 蒙書體를 떠나 通行體를 印에 刻하게 되었다. 宋代의 官印 特徵은 唐代에 商芽를 보인 九量蒙의 完成으로 다음의 金代에는 方二三寸의 大印으로 두꺼운 輪廟中에 機檢的으로 字劃을 쌓아올리는것 같은 形式에 定着되었으니 이 風은 元, 明, 淸 後代까지 一貫해서 史尾하였다. 一方 來元期에 民間 雜用의 私印 花押印이 菜生하였고,元代에는 蒙古 文字의 特異體가 나타나고,明代에는 이제까지 轉化된 合同印, 系印이 나와서 우리나라에도 渡來하게 되었다.
    • 7. 明,淸時代 近代寒刻의 生長
    • 唐代에 生芽한 收藏印, 堂號印 等의 使用은 末代 金石學의 勤興과 結合해 서 文人의 刻印越味로 進展되어 雅號印 成語印 等이 나오게 되었으니 印의 用途에 새로운 길을 開招한 것이다. 다시 元의 吾丘衍, 越子聲의 印字再與의 氣運이 讓成 되고 明代에 는 運刀에 自由로운 石材의 出現으로 一 擧에 開花되어 文三槍, 何雪 漁의 先覚을 輩出하여 藝術의 一科로서 蒙刻道가 樹立 되었다. 明, 淸의 交에 일어 난 考證學은 金石 越味의 與을 일으키고 古銅印譜의 盛行과, 印의 古典復歸의 運動을 展開시키었다. 程德을 依祖로한 微派의 蓋小池, 巴慰祖, 胡唐,王齊의 四家,丁敬身으로 시작된 新派의 西冷八家(將山堂, 黃小奏, 蒙泉, 陳秋堂,陳憂生,越次閑,錢救蓋) 皖派의 始祖鄭完白에 連하여 其讓之, 越之嫌,其昌領等 많은 名手들이 淸朝 藝死을 多彩롭게 하였다.